시인이야기

슬픔에게 안부를 묻다. (류시화)

쎌리하성 2007. 8. 22. 07:43

슬픔에게 안부를 묻다. (류시화)




너였구나


나무뒤에 숨어 있던 것이
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
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
슬픔, 너였구나


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
날이 저물기 전에
서둘러 이 겨울숲을 떠나려고 했었다
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
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 거린다


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
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
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
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


한 때 이곳을 울려 퍼지던 메아리의

주인들은지금 어디에 있는가
나무들 사이를

오가던 흰 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
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
너였구나


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
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
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
너였구나


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
서둘러 말을 타고 이 겨울숲과 작별하려 했었다
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


슬픔, 너였구나.................